멋진 신세계
(천재 작가 올더스 헉슬 리가 만든 환상의 세계)
1. 책 리뷰 : 이 책이 쓰여진 시기와 작가에 대하여
이 책은 1932년 작품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100년 전 작품이다. 그런 글이 사장되지 않고 읽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를 짐작케 한다. 1932년이면 지금보다 과학의 진보가 훨씬 두드러지기 전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내용은 지금 읽어도 놀라울 정도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이 출간되었을 당시 독자들은 얼마나 이 소설의 내용이 충격적이고 신선했을까? 2022년에도 아직 이 책에서 말하는 과학적 진보까지를 이루지 못했다. 생명을 공장처럼 찍어내는 것과 같은 것들. 그 당시에 이런 상상이 가능했던 이유는 작가의 가족력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할아버지가 저명한 생물학자 토마스 헨리 헉슬리이다. 영문학을 전공한 작가이지만 가족의 영향인지 그는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책을 읽어보면 일반인이 감히 상상해 내기에는 너무 방대하고 깊은 지식이 등장한다. 분명 작가는 천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 당시에 전공도 아닌 분야에 이런 깊은 지식을 가지고 100년이나 앞서는 상상으로 탄생한 작품이 바로 이 멋진 신세계인 것이다.
이 작품은 어쩌면 한 줄로 끝날 수 있는 가상의 스토리를 아주 촘촘한 스토리와 상상을 덧입혀 너무 현실감 있게 그려놓았다. 다 읽고 나서 비슷하게 쓰라고 해도 어려울 정도이다. 작가의 엄청난 상상력과 그것을 글로 풀어놓는 섬세하고 세밀한 능력이 참으로 돋보인다.
2. 소설의 줄거리
이 소설에는 두 개의 세상이 존재한다. 하나의 세상은 신세계. 그리고 하나는 오늘날 일반적인 인류가 살아가는 세계.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신세계는 멋진 곳으로 묘사된다. 신세계에는 엄마와 아빠가 없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엄마의 태중에서 임신을 통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유리병에서 다양한 조절과 관리를 받아 생명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모와 자식과 같은 관계에서는 오는 끈끈한 감정들은 철저하게 배제된다. 오히려 그들은 ‘엄마’라는 단어를 굉장히 미개하고 열등한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그리고 신세계에서는 다양한 감정들도 모두 원천 봉쇄를 시킨다. 예를 들면 불안함, 후회, 그림움과 같은 감정들이 올라오면 ‘소마’라는 알약을 먹는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문제와 감정에서 즉각적으로 벗어나 버린다. 마치 오늘날 마약을 먹고 사람들이 현실을 잊고 사는 것처럼. 사람들은 철저하게 계급으로 분류되어 태어나고 그 계급에게 맞는 삶을 살아간다. 그들은 다른 계급으로 올라가려고도 하지 않고 비교도 하지 않고 불평도 하지 않는다. 또한 이 세계에서는 서로에게 절대로 속하는 관계가 없다. 만인은 만인의 것이라는 생각을 주입시켜 매일 다른 상대와 섹스를 하며 관계를 맺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당연히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서 오는 친밀감도 없고 증오도 없다. 그 사회는 그렇게 아무 감정도 없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그런데 이 세계에 사는 버나드라는 한 사람이 야만인보호구역으로 여행을 떠난다. 이 소설 속 야만인보호구역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일반적인 세상이다. 이 소설 속에서 야만인보호구역은 이름처럼 야만적인 세상으로 그려진다. 관리되고 통제되고 철저하고 만들어진 세상에서 바라볼 때 이 세상은 더럽고 온갖 쓸데없는 관계들로 얽혀있는 한 마디로 엉망인 세상이다. 이 야만인보호구역에서 버나드는 린다라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린다는 멋진 신세계에 살다가 연인과 야만인보호구역에 잠시 왔다가 사고를 당해 돌아가지 못하고 출산을 해 애를 낳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중이었다. 그녀가 낳은 아들 ‘존’은 버다드를 따라서 자신의 엄마 린다와 함께 멋진 신세계로 들어간다. 여기에서부터 소설의 갈등은 시작된다. 완벽한 세계라는 곳에서 존은 고뇌한다. 인간들은 찍어낸 기계와 다를 바가 없다. 감정도 없고 생각도 없고 관계도 없다. 존은 이 세계에서 자신의 엄마 린다가 ‘소마’에 취해 자신조차 기억을 못하는 상황을 맞이하고 인간성을 상실한 신세계에 진절머리를 내며 그 세계를 떠나기를 원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세계에서 잠시 떨어져 자유를 누리는 듯했지만 그런 그의 모습을 신기하게 여기는 신세계의 수많은 무리가 찾아와 존을 구경하고 조롱한다. 마침내 존은 그 현실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택하며 이 소설은 끝이 난다..
3. 등장인물 관계
- 버나드 : 멋진
신세계에서 약간 부족한 존재로 태어나 삶에 만족감을 100% 누리지 못하고 무언가를 사색하고 추구하는 인물. 존을 신세계로 데려와 엄청난 명성을 얻지만 곧 존이 혼란스러워하자 곤경에 처함.
- 존 :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젊은이가 되어 버나드와 함께 신세계로 들어옴. 어머니 린다가 ‘만인은 만일을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존이 어린시절 숱한 남자들이 어머니와 성관계 맺는 것을 봄. 그리고 신세계로 돌아온 린다가 소마에 취해 아들인 자신을 기억조차 못하는 사실에 분개함. 신세계에서 유일하게 인간성을 지닌 인물로 신세계의 모습에 환멸을 느끼고 세계를 떠나고자 하나 그 세계에서 결국 자살을 함.
- 레니나 : 버나드와 함께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갔다고 존을 만남. 신세계로 돌아온 존을 사랑하지만 사랑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혼란스러워하며 소마로 자신의 감정을 달램. 존은 레니나를 사랑하지만 아무 남자하고 성관계를 맺는 레니나의 행동을 보며 창녀라고 비난하면서 불타오르는 감정에 고통스러워함.
- 린다 : 신세계에서 태어나 살다가 야만인보호구역에 사고로 남게 되어 존을 출산하고 지옥 같은 삶을 연명함. 신세계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던 많은 남자들과 성관계를 맺는 일이 그곳에서는 잘못된 일이 되어 폭행을 당함. 다시 돌아온 신세계에서 소마에 취해 살다가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
4. 인간성을 대표하는 존
존은 인간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신세계를 견뎌내지 못한다. 존은 신세계를 떠나고자 결단하면서 총통이라는 자와 대화를 한다.
“하지만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고 있군 그래.”....
“그렇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나이를 먹어 추해지는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떨어지는 권리, 이가 들끓을 권리,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끊임없이 불안에 떨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온갖 표현할 수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도 요구하겠지?”
긴 침묵이 흘렀다.
“저는 그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368쪽)
이 부분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인간성이 아니었을까? 사람은 누구다 안정된 삶을 원한다. 그러나 동시에 자유를 원한다. 신세계에는 어떤 예측되지 않은 불안정한 일은 일어나지 않지만 그 말은 동시에 모든 것들이 다 통제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심지에 그 세계에서는 늙는 것조차 자유롭지 않다. 죽기 전까지 거의 그대로 외모가 유지되다가 한순간에 늙고 죽음을 향해 간다. 그리고 죽음을 애도할 수 있는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어차피 부모 자식, 부부라는 관계가 없으니 애틋하고 슬플 사람도 없지만 죽음을 슬퍼할 이별의 사건이 아니라는 교육을 어려서부터 받는 곳이 신세계다. 그리고 판에 박힌 외모들. 아무런 고민도 사색도 필요하는 노동들. 먹고, 자고, 일하고. 이 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됨에 대한 고민을 깊은 곳에서부터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는 지독하게 고통스럽다. 생계를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고 질병과 싸워야 하며 얽힌 수많은 관계 속에서 아픔도 주고받는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없는 곳이 천국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작가는 그런 의문에 답하듯이 이 책을 쓴 것이다.
5. 천국
인간 세계의 모든 고통의 요인들을 제해버린 세상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정말 그곳이 천국인가? 대답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고통스러운 시간들도 마땅히 겪어내야 가능하다. 우리가 진정으로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진정한 사랑을 원하기 때문이다. 관계를 맺으며 살이 베이는 듯한 고통 속에서 신음하지만 여전히 관계를 갈구하는 까닭은 그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삶의 원동력들이 있기 때문이다. 고통도 아픔도 결국은 우리 삶의 소중한 일부라는 것을 작가는 우리에게 말한다. 말 그대로 고통받을 권리, 자연스럽게 늙어갈 권리, 아파할 권리, 슬픔을 느끼고 외로워할 권리.... 이것을 권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나? 오히려 내가 삶에서 겪고 싶지 않은 것들이라고 치부하지는 않았을까? 이 소설을 접하기 전까지는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멋진 신세계의 작가는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그 모든 조각들로 삶이 진정으로 삶다워지고 인간다워진다는 것을. 아무 생각 없이 사느니 죽음 같은 고뇌로 가득한 삶을 감당하겠다고 말한다. 자유와 권리 없이 기계처럼 사느니 차라리 그런 세상에서는 죽음을 택하겠다고 작가는 말한다. 존은 그런 작가의 번민을 대표하는 인물인 것이다.
6. 이 시대에 이야기하는 것, 메세지
과학의 발전 속에서 우리가 잃게 되는 것들을 떠올리게 한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하루 생활권에 들어선 요즘 사람들은 빠르게 살아간다. 많은 양의 정보를 처리하고 많은 양의 일들을 해낸다. 그래서 옛날 같은 빈곤과 질병들은 어느 정도 다룰 수 있게 되었을지 모르지만 그 이면에 자연이 들려주는 사소한 이야기들은 듣기가 어려워졌다. 허리를 굽혀 고된 노동 끝에 맛보는 시원한 바람 같은 것들. 아주 사소한 행복의 이야기들. 저장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소를 잡으면 온 동네잔치가 벌어지고 함께 가을걷이를 하며 힘을 보태고 즐거움도 함께 나누던 일들. 높은 빌딩숲 사이에서 사라져 버린 가을 하늘의 청명함들. 기다리던 소식을 들고 오던 우체부 아저씨의 정겨운 발소리들. 골목길에서 밤늦도록 뛰어놀며 하루가 짧게만 느껴졌던 아이들의 재잘거림. 과학은 모든 것을 편리하고 만들었고 빠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인간 사회를 지극히 작게 혹은 크게 만든다. 과학이 인간성을 회복시킨 부분이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 이면도 너무 확실히 있다. 기계화되고 수치화되고 정량화되는 사람들. 기술과 과학, 자본 같은 중요한 것들 외에는 어쩌면 외면받는 사람들의 감정과 인간성들, 그리고 관계들.
오늘날 과학은 잃어버리고 있는 인간성을 회복하는 방향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 독거노인들을 위한 펫로봇 같은 발명품들이 있다. 더불어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도 내 삶을 인간답게 만드는 일부라는 사실이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다 때려치우고 쉬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그런데 정년퇴임을 하시고 소일거리가 없어 쉬시다가 몇 년 되지 않아 삶의 의욕을 잃고 기운이 빠져버리신 어르신들을 보면 일할 수 있는 게 복이고 일을 해야 휴가도 꿀 같고 주말도 꿀처럼 달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희로애락 모든 것이 내 삶임을 기억하고 누리고 싶다.